우리집은 꽤나 단촐한 편이다. 집이 크지도 않거니와 보통 필수템이라는 가전도 대부분
갖고 있지 않다. 소유욕이 없는 거 치고는 생각보단 물건이 많네 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그래도 내가 가본 모든 사람 집 중에서 우리집만큼 살림이 적은 곳은 없었다.
이런 나의 무소유욕은 심지어 좋아하는 책에서까지 나타난다.
책을 다 읽고나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곧장 팔거나 누구를 주거나 기증해 버린다.
난 대체로 한번 읽으면 다시 읽는 타입이 아니었고, 10년 넘게 가지고 있는 책도 있지만
단 한번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때 팔지 않은 걸 후회한 적도 있다.
게다가 자주 이사를 다니는 전세살이의 특성상, 아무래도 책은 짐이 되어 버린다.
앞으로 이사할 것을 대비해 되도록 짐을 줄이고 심플하게 다음 집으로 이동하고 싶은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런 책 바로팔기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으니...
트립북앤스페이스
▶관광학 교수와 전공자들이 운영하는 여행전문서점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 92 4층
https://blog.naver.com/tlibbooknspace
그 날은 무더운 여름이었고, 친하게 지내던 회사 후배와 오랜만에 만나서 성수동에서 만나서
놀기로 한 날이었다.
난 올해 초부터 독립서점을 다니기 시작했다는 개인적인 얘기를 회사 후배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기에
사전에 성수동 독립 서점을 몇군데 찾아 보긴 했지만 한 군데만 가보기로 했다.
딱 우리가 다니는 동선에 위치하고 있었던 트립북앤스페이스 라는 여행서적 전문 서점이다.
트립북앤스페이스는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치기 쉽다.
게다가 입구가 눈에 띄지 않아, 모르고 지나쳤다가 다시 되돌아서 찾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3층 올라가기 전부터는 계단 벽면에 무료 배포용 여행 책자
같은 것이 전시되어 있어 서점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아무도 없어서 조금 당황했지만, 곧 책방지기가 들어왔다.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세미나실 같은 것이 있고 가운데 공간과 왼쪽 별도 공간에 책이 진열되어 있다.
여행서점답게 주로 여행 관련 책이 진열되어 있고 환경 관련 책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책 구매자에 한해 위층 테라스에 올라가서 책을 읽어볼 수도 있다.
위층 테라스엔 루프탑처럼 되어 있어 날씨만 좋다면 올라가서 책을 읽어도 좋을 거 같다.
다만 도로변에 있기 때문에 소음이 심하고 미세먼지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윗 공간은
책 읽는 용도라기 보다는 카페가 적합해 보였다.
같이 있던 후배가 뭐 책사러 오신 거예요? 라고 물어봤기 때문에
예쁜 서점이 있다길래 들려보고 싶었다고 대충 둘러댄 뒤 서둘러 서점을 둘러보았다.
그 때 마침 눈에 띈 책이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였다.
"아, 김영하 이거 신작 아냐? 이 책 읽고 싶었어! 이거 사야겠다"
후배가 별로 흥미가 없어 보여 얼른 계산하고 나가야지 라는 생각으로 책을 들고 계산대에 갔다.
책을 카드로 계산하려고 했는데, 책방지기님이 카드기계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혹시 계좌이체는 안되실까요 라고 해서 5만원밖에 없는 잔고에서 12,150원을 이체했다.
(회원가입하면 10% 할인 해준다)
이렇게해서 짧은 성수동 서점 투어를 마치고 후배와는 밀도에서 빵을 사고, 블루보틀에서 커피를 마셨으며,
호호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모나미스토어를 구경한 뒤 헤어졌다.
그리고 몇달 뒤에, 이제 그곳에서 산 책을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여행의 이유 몇 페이지를 읽었는데
너무나 심각한 기시감이 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뒷 내용이 알듯말듯 생각이 나는 것이다.
설마설마 하면서 한 챕터를 다 읽고서는 깨달았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신간도 아니었고 이미 2~3년 전에 출간됐을 때 읽었던 건데 기억을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읽고 바로 팔아도 그렇지 이렇게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번 읽은 책을 까먹고 다시 산 건. (나이 탓일수도 ㅠㅠ)
트립북앤스페이스를 들어갔을 때 나의 취미를 모르는 회사 후배랑 있어서 긴장한 탓에
기억이 홀랑 상실된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읽었던 책을 모르는 책인양 산 건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다.
이러한 이유로 어쨌든 책을 다시 읽고 있다. 출간된 지 아직 3년이 안됐으니까 못해도 3년만에 다시 읽는다.
김영하의 문장은 여전히 솔직하면서 담백하고 문장 구성이 좋아 술술 읽힌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의 산문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그나저나 이 책은 다시 팔아야 할지가 고민이다.
이렇게 다시 돌아온 것도 인연인데 좀 더 책장에 놔두어 볼까?
사실 책장도 없지만.
'미스터리 독립책방투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인구는 감소하는데 독립책방은 왜 늘어만갈까? (0) | 2023.02.23 |
---|---|
2022 경기서점학교 후기 (0) | 2023.02.07 |
[후암동] 스토리지북앤필름 책방지기 체험 (0) | 2022.12.28 |
[연희동] 유어마인드, 책바 (1) | 2022.12.23 |
사실 미스터리 없는 독립책방투어 (0) | 2022.12.23 |
댓글